이집트 여행준비를 하면서 관광지 정보를 찾다보면 자주 접하게 되는 이집트의 파라오들이 있다.
특히 자기애가 강해서 수많은 유적지를 만들어낸 람세스 2세, 유일하게 황금마스크가 남아있는 투탕카멘, 마지막 파라오인 클레오파트라 세명이다.
람세스2세가 만들어낸 유적지가 워낙 많다보니 이걸 어떻게 만들었는지, 이 파라오가 살던 시절이 어떤 시대인지 궁금했다. 그렇게 시작된 GPT와의 대화이다. 너무 흥미로워서 블로그에 남겨둔다.
나의 무식한 질문에 똑똑한 GPT가 대답해주는 것이다.
내 질문은 초록색으로 표기했다.
Q. 람세스2세는 청동기시대야?
A. 아니요, 람세스 2세는 청동기 시대가 아니라 철기 시대에 해당하는 인물입니다.
람세스 2세(기원전 1290년~1224년 재위)는 고대 이집트 신왕국 시기의 19왕조에 재위한 파라오입니다. 청동기 시대는 대체로 기원전 3000년1200년경으로 정의되며, 람세스 2세는 이 시기가 끝나고 철기가 사용되기 시작한 이후에 활동했습니다. 이 시기를 특히 청동기 말기에서 철기 초기에 해당하는 전환기로 보기도 합니다.
람세스 2세는 히타이트와의 카데시 전투(기원전 1274년), 대규모 건축 사업(예: 아부심벨 신전)으로 유명하며, 그의 통치는 이집트 문명의 전성기 중 하나로 평가받습니다.
Q. 이집트는 언제까지 청동기시대였어?
A. 이집트는 기원전 약 1200년경까지 청동기 시대에 있었고, 이후 철기 시대로 전환했습니다. 이 시기는 고대 이집트 역사에서 신왕국 시대 말기에 해당합니다. 청동기 시대와 철기 시대의 구분은 주로 금속 사용의 변화와 이를 기반으로 한 사회적, 기술적 발전에 따라 결정됩니다.
1. 이집트의 청동기 시대
- 시작: 기원전 약 3000년경부터 이집트는 청동기 문화를 발전시켰습니다.
- 청동은 구리와 주석을 섞어서 만든 금속으로, 무기, 도구, 장식품 제작에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 초기 왕조 시대(기원전 약 3100년~2686년)부터 청동은 점점 더 중요한 자원이 되었습니다.
- 전성기: 신왕국 시대(기원전 약 1550년~1070년경)는 청동기 문명의 절정기였습니다.
- 이 시기 이집트는 강력한 군사력과 대규모 건축 사업으로 유명했으며, 청동 무기와 도구는 필수적이었습니다.
- 람세스 2세(기원전 1279~1213년)는 이 시기의 대표적인 파라오로, 청동 무기를 사용한 대규모 전투(예: 카데시 전투)에서 활약했습니다.
2. 철기 시대로의 전환
- 기원전 약 1200년경부터 철기가 등장하면서 이집트와 주변 지역에서는 점차 철기가 청동을 대체하기 시작했습니다.
- 철기는 더 단단하고 청동보다 자원을 구하기 쉬웠습니다.
- 철기 시대의 시작은 "해양 민족의 침략" 및 신왕국의 몰락과 같은 대규모 사회적 변화와 맞물려 있었습니다.
- 이집트의 철기 도입:
- 이집트에서는 기원전 10세기경 철제 무기와 도구가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 그러나 철기는 청동보다 제작이 까다로웠기 때문에, 초기에는 주로 군사 목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3. 왜 철기 시대로 늦게 넘어갔는가?
이집트는 철기 시대에 비교적 늦게 진입했는데, 이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 청동 자원의 안정적인 확보: 이집트는 동부 사막과 시나이 반도에서 구리와 주석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 기술적 보수성: 이미 잘 발달된 청동기 기술이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기술 도입이 느렸습니다.
- 외부와의 교류 부족: 초기 철기는 히타이트와 같은 주변 지역에서 먼저 발달했으며, 이집트는 이를 늦게 받아들였습니다.
결론
이집트는 청동기 시대를 기원전 1200년경까지 유지했으며, 이후 철기 사용이 증가하면서 점차 철기 시대로 넘어갔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는 이집트 역사에서 신왕국 말기와 제3중간기로, 정치적, 경제적 불안정도 함께 겪던 시기였습니다.
Q. 이집트는 기원전 1200년경부터 철기시대인데 우리나라는 기원전 500년전부터야? 차이가 왜이렇게 많이 나?
A. 이집트와 한반도의 철기 시대 전환 시기의 차이는 지리적 위치, 자원 접근성, 기술 확산 경로 및 문화적 환경과 같은 여러 요인에 의해 발생했습니다. 이 차이는 단순히 기술 수준의 우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각 지역의 역사적, 환경적 조건에 따른 발전 속도의 차이로 이해해야 합니다.
1. 지리적 위치와 기술 확산 경로
- 이집트는 서아시아와 지중해 지역의 중심에 위치해, 기술과 문화가 빠르게 교류될 수 있는 환경에 있었습니다.
- 철기 기술은 기원전 1200년경에 히타이트 제국(현대 터키 지역)에서 발달했고, 이 기술이 이집트를 포함한 주변 지역으로 빠르게 전파되었습니다.
- 이집트는 무역과 전쟁을 통해 철기 기술을 일찍 접할 수 있었습니다.
- 한반도는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철기 기술이 전파되기까지 시간이 걸렸습니다.
- 철기 기술은 중국 북부(예: 연나라)와 만주를 통해 한반도로 전파되었습니다.
- 이 과정은 수백 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이루어졌고, 한반도에 본격적으로 철기가 도입된 시점은 기원전 5세기경으로 추정됩니다.
2. 자원의 차이
- 이집트는 풍부한 금속 자원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철기 제작에 필요한 자원을 확보할 수 있는 무역 네트워크가 발달해 있었습니다.
- 이집트는 시나이 반도와 아프리카 지역에서 구리, 철 광석 등을 수입할 수 있었습니다.
- 한반도는 청동기 시대에 구리와 주석 자원을 기반으로 발전했으며, 철광석은 풍부했지만 철을 다루는 기술은 외부에서 유입되어야 했습니다.
- 철기 기술은 중국에서 발달해 주변 지역으로 확산되었으므로 한반도에서 철기 제작 기술을 자체적으로 발전시키는 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3. 사회적 필요성의 차이
- 이집트는 당시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로, 군사력과 경제력 강화를 위해 철기 기술이 필수적이었습니다.
- 철제 무기와 도구는 이집트의 군사력과 건축 능력을 크게 향상시키는 데 기여했습니다.
- 한반도는 청동기 시대 후반까지 농경 사회와 부족 사회가 중심이었기 때문에 철기 기술의 필요성이 상대적으로 덜했습니다.
- 철기 기술 도입 이후, 철제 농기구와 무기를 통한 생산성과 군사력 증대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4. 문화적 보수성과 적응 속도
- 기술 도입은 단순히 자원의 문제뿐 아니라, 이를 수용하는 문화적 환경에도 영향을 받습니다.
- 이집트는 외부 기술을 수용하는 데 적극적이었지만, 한반도는 전통적인 청동기 문화를 유지하면서 점진적으로 철기 기술을 받아들였습니다.
5. 결론
이집트와 한반도의 철기 시대 전환 시기의 차이는 각 지역의 지리적 위치, 기술 전파의 경로, 자원 접근성, 사회적 필요성 등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 이집트는 기술 교류의 중심지로서 철기 시대에 일찍 진입했지만,
- 한반도는 동아시아의 기술 전파 경로에서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기원전 5세기경에서야 철기 시대에 진입했습니다.
이 차이는 단순히 발전 속도의 문제라기보다는, 각 문명이 처한 환경적 조건과 발전 방향의 차이로 이해해야 합니다.
Q. 투탕카멘 다음 파라오가 람세스지? 그럼 투탕카멘의 아들이야?
A. 투탕카멘의 다음 파라오는 람세스 2세가 아닙니다. 그리고 람세스 2세는 투탕카멘의 아들이 아닙니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왕조에 속해 있습니다.
투탕카멘과 람세스 2세의 관계와 역사적 배경
- 투탕카멘
- 재위: 기원전 1332~1323년경
- 이집트 신왕국 18왕조의 파라오로, 아버지는 아케나텐(아멘호텝 4세)로 알려져 있습니다.
- 투탕카멘이 죽은 후 직계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뒤를 이어 **아이(Ay)**와 **호렘헤브(Horemheb)**가 파라오가 되었습니다.
- 18왕조는 호렘헤브를 끝으로 멸망하게 됩니다.
- 람세스 2세
- 재위: 기원전 1279~1213년경
- 이집트 신왕국 19왕조의 파라오로, 투탕카멘과는 약 50년 이상의 시간 차이가 있습니다.
- 람세스 2세의 아버지는 19왕조의 창시자인 세티 1세입니다.
즉, 두 사람은 같은 신왕국 시대에 속해 있지만 서로 다른 왕조의 파라오이며, 가족 관계도 없습니다.
Q. 왕조와 왕조 사이엔 아들이 아니라 남이 즉위하는거야?
A. 왕조와 왕조 사이에는 반드시 아들이 계승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집트의 왕조 교체는 혈연 관계가 끊길 때뿐만 아니라, 정치적 혼란, 권력 다툼, 또는 외부 침략으로 인해 발생했습니다. 새로운 왕조는 기존 왕조의 왕족이 아닌 경우도 많으며,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새로운 파라오가 즉위했습니다.
1. 직계 혈통의 단절
- 파라오가 자녀를 남기지 못하거나, 유력한 후계자가 없는 경우, 왕족 내 다른 인물이 계승하거나 전혀 다른 계층의 인물이 즉위했습니다.
- 예: 투탕카멘의 사후
- 그는 자녀 없이 사망했고, 이후 **아이(Ay)**라는 고위 관리가 즉위했습니다.
- 아이가 죽은 뒤엔 군인 출신인 호렘헤브가 권력을 잡았습니다.
- 호렘헤브는 왕족이 아니었지만, 군사적 권력으로 18왕조를 마무리하고 19왕조의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2. 군사 지도자나 고위 관리의 즉위
- 왕권이 약화된 시기에는 군사 지도자, 고위 관리, 또는 제사장 계층이 권력을 잡고 새 왕조를 세우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 예: 호렘헤브 → 람세스 1세
- 호렘헤브는 후계자를 남기지 않고 자신의 신하였던 람세스 1세를 후계자로 삼았습니다.
- 이로 인해 19왕조가 시작되었습니다.
3. 외부 세력의 영향
- 외부 세력이 이집트를 침략하거나 내부 혼란이 심할 때, 외부 인물이 권력을 장악하고 왕조를 바꾸기도 했습니다.
- 예: 제2중간기 당시, 히크소스가 이집트를 점령하고 새로운 왕조(15왕조)를 세웠습니다.
4. 혼인 동맹을 통한 계승
- 왕족이 끊기지 않도록 파라오의 딸이나 자매와 결혼한 남성이 새 파라오로 즉위하기도 했습니다.
- 예: 투탕카멘의 후계자인 아이는 투탕카멘의 미망인인 안케센아멘과 결혼하여 권력을 정당화했습니다.
이처럼 왕조 간 계승은 혈연보다는 정치적 상황, 힘의 균형, 그리고 파라오로서의 정통성을 주장할 수 있는 능력에 따라 결정되었습니다.
Q. 클레오파트라가 처음부터 파라오로 인정 받았으면 로마의 권력가들과 결탁할 일이 없었을텐데 아쉽다. 여자라고 파라오 안시킨걸까?
A. 클레오파트라는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로 정식으로 인정받은 통치자였습니다. 그녀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파라오로, 기원전 51년에 즉위했지만, 그녀의 권력이 불안정했던 이유는 단지 여성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1. 클레오파트라가 파라오로 즉위한 과정
- 기원전 51년: 클레오파트라는 아버지인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죽은 후, 그의 유언에 따라 18세의 나이에 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공동 통치자로 즉위했습니다.
- 공동 통치의 전통: 이집트에서는 파라오의 왕권을 신성하게 여기며, 한 명이 아닌 남녀 공동 통치가 일반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남성이 더 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 클레오파트라는 동생과의 권력 다툼에서 승리하며 단독으로 통치하려 했지만, 이 과정에서 많은 내부 갈등과 외부 압박을 겪었습니다.
2. 여성 통치자에 대한 이집트의 전통적 관점
- 이집트는 비교적 여성 통치자에 개방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 핫셉수트: 신왕국 시대의 여성 파라오로, 남성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사용하며 성공적인 통치를 이끌었습니다.
- 하지만 여성 통치자는 항상 정치적, 종교적 정당성을 지속적으로 증명해야 했고, 권력을 안정시키기가 어려웠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파라오로 즉위했지만,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자체가 이미 내부적으로 약화되고 외부적으로 로마에 의존하던 상황이었습니다.
3. 로마와의 관계: 단순한 생존 전략
클레오파트라가 로마의 권력가들과 결탁한 이유는 그녀의 권력을 유지하고 이집트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 정치적 현실: 당시 이집트는 로마의 경제적, 군사적 압력 아래 있었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로마와의 동맹 없이는 이집트를 독립된 왕국으로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
- 클레오파트라는 로마의 강력한 지도자들과 동맹을 맺어 이집트의 독립을 보장받으려 했습니다.
- 카이사르와의 동맹은 그녀의 권력을 강화했지만, 그의 암살 후 권력 공백이 생겼습니다.
- 안토니우스와의 동맹은 초기에는 유리했으나, 옥타비아누스와의 대립에서 결국 패배로 이어졌습니다.
4. 왜 클레오파트라는 안정적인 통치자가 되지 못했는가?
- 여성이라서가 아니라 당시 이집트의 정치적 상황 때문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로마와의 의존도가 높았고, 국내에서는 귀족과의 갈등이 심했습니다.
- 클레오파트라는 탁월한 외교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로마의 내전과 이집트 내부의 불안정이라는 두 가지 난제를 동시에 해결하기 어려웠습니다.
5. 결론
클레오파트라가 처음부터 남성 파라오와 동등한 권력을 가진 단독 통치자로 인정받았더라도, 로마의 압도적인 영향력과 이집트의 쇠퇴라는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외교 전략과 정치적 야망은 당시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노력이었으며, 결국 이집트 역사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지도자로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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